제 760 호 ‘문송합니다’는 옛말…AI 시대, 재발견되는 인문계 전공의 가치
취업하려면 이공계로 가야 한다” 사회에서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온 진로 공식이다. 대학 입시부터 취업 시장까지 자연계열이 인문계열보다 유리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고, 이는 학생들의 전공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취업 시장에서 공학 계열 전공의 취업률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면서 이러한 인식은 더욱 굳어졌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표현이 바로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다. 인문계열 학생들이 취업난을 자조적으로 표현하며 사용하기 시작한 이 말은 어느새 청년 세대의 현실을 상징하는 유행어가 됐다.
그러나 최근 취업 시장에서는 이러한 통념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의 확산으로 산업 구조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상의 기준 역시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을 개발하는 능력뿐 아니라 이를 해석하고 설명하며 시장과 사회에 전달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해지면서,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비판적 사고를 갖춘 인문사회계열 인재에 대한 수요가 점차 늘어나는 분위기다.▲ AI로 만든 기사 관련 이미지 (사진: 구글 ‘제미나이’)
AI 시대, ‘이야기하는 능력’이 경쟁력
생성형 인공지능(AI)의 확산은 역설적으로 ‘사람의 언어’의 가치를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텍스트와 콘텐츠를 빠르게 생성할 수 있지만, 맥락을 이해하고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설계하는 능력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많다. 기업들이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자사 기술과 서비스의 의미를 설명하고 시장을 설득하는 ‘이야기’를 필요로 하면서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갖춘 인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채용 전략에서 나타난다. AI 기업 엔트로픽은 최근 미국 본사에서 근무할 ‘고객 마케팅 리드’ 채용 공고를 내고 연봉 20만~25만 5000달러(약 2억9000만~3억6800만 원)를 제시했다. 이 직무는 고객 성공 사례를 발굴하고 이를 콘텐츠로 제작해 확산시키는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을 담당한다. 자사 AI 서비스 ‘클로드’가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고 설득력 있는 서사를 구축하는 역할도 포함된다.
커뮤니케이션 인재에 대한 높은 보상은 다른 기업에서도 확인된다. 넷플릭스는 제품·기술 커뮤니케이션 담당 이사 채용 공고에서 연봉 77만 5000달러(약 11억 원)를 제시했으며, 오픈AI 역시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총괄 직무에 38만 7000~43만 달러의 연봉을 내걸었다. 해당 직무는 산업별 스토리텔링 전략을 수립하고 경영진 메시지를 외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밖에도 아마존웹서비스와 애플 역시 AI와 기술 분야 메시지를 담당할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채용에 나서고 있다. 아마존웹서비스(AWS)는 2월 5일(현지시간) 연봉 11만4000~18만8500달러(약 1억 6400만~2억 7200만 원)을 조건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채용을 진행했다. 애플의 경우 지난해 12월 AI·머신러닝 분야 커뮤니케이션과 제품 메시지·미디어 스토리 작성 능력을 갖춘 시니어 매니저 채용 공고를 올리며, 연봉 19만1400~28만 8000달러(약 2억 7600만~4억1500만 원)을 제시했다.
다시 주목받는 인문계 역량
전문가들은 이러한 흐름이 단순한 채용 트렌드가 아니라 기업 전략의 변화라고 분석한다. 컨설팅 업체 콘 페리에 따르면 포춘 500대 기업 최고커뮤니케이션책임자(CCO)의 연봉 중위구간은 지난해 기준 40만~45만 달러로 전년보다 약 5만 달러 상승했다. 이는 기업들이 커뮤니케이션 직무를 단순 홍보 업무가 아니라 기업 전략과 브랜드 가치를 형성하는 핵심 기능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기술의 의미를 해석하고 사회와 시장에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이 중요해지면서, 오랫동안 취업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던 인문사회계열 역량 역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미국 경제 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이 같은 추세에 대해 "생성형 AI가 저품질 콘텐츠로 온라인을 장악한 상황에서 사람이 직접 작성한 글이 더 돋보이고 가치를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비판적 사고와 글쓰기, 맥락을 읽는 능력 등 인문학적 훈련을 통해 길러지는 역량이 바로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AI 시대에는 기술을 개발하는 능력뿐 아니라 그 기술을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 역시 기업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한때 취업난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문송합니다’라는 표현이 더 이상 절대적인 현실이 아닐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좁혀지는 문이과 취업률 격차▲졸업생 취업률 상위 10개 대학 현황(사진: 종로학원, https://n.news.naver.com/article/018/0006206512?sid=102)
취업 통계에서도 이러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종로학원이 대학 정보 공시 사이트 대학알리미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인문·자연계열 간 취업률 격차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6.9%포인트까지 벌어졌던 격차는 이후 점차 감소해 2025년에는 3.4%포인트까지 축소됐다. 최근 10년 사이 가장 적은 격차이다.
특히 서울 소재 43개 대학만 놓고 보면 격차는 더욱 줄어든다. 2025년 기준 인문계열 취업률은 64.5%, 자연계열은 66%로 두 계열 간 차이는 1.5%포인트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변화의 원인으로 복수전공 확대와 무전공 선발 전형 증가 등을 꼽는다. 다양한 학문을 융합해 역량을 키우는 교육 환경이 조성되면서 전공 간 취업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복수 전공 활성화와 인공지능 시대 융합형 인재 수요 증가로 과거의 자연계 쏠림 분위기가 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취업 보장 전공’에서 등장한 ‘컴송합니다’
반면 한때 취업 시장에서 ‘최강자’로 불리던 컴퓨터공학 전공 취업률은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대학 취업률 공시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부 취업률은 2023년 83.8%에서 2025년 72.6%로 감소했다. 카이스트 전산학부 역시 같은 기간 77.9%에서 69.8%로 떨어졌다. 다른 대학에서도 비슷한 하락 흐름이 나타났다.
▲ 주요 대학 컴퓨터공학과 취업률(사진: https://n.news.naver.com/article/009/0005634777?sid=102)
AI 개발 초기만 해도 컴퓨터공학과는 최대 수혜를 입을 전공으로 뽑혔다. 그러나 신입 개발자가 하던 기초 코딩과 문서화 작업을 생성형 AI가 빠르게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취업률이 눈에 띄게 하락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도 기업들은 생성형 AI를 업무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신입 개발자 채용을 줄이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앤드컴퍼니 조사에 따르면 생성형 AI를 업무에 도입한 기업 비율은 2023년 33%에서 2024년 65%로 크게 증가했다. 한국노동연구원 보고서에서도 소프트웨어 개발 직무 채용 공고 가운데 신입 비중이 2022년 53.5%에서 2024년 37.4%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AI가 기초적인 코딩 업무를 수행하면서 신입 개발자 수요가 줄어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작년 한국 대형 게임사 ‘크래프톤’ 같이 이공계 학생들이 선호하는 IT 기업들이 AI를 업무 전반에 도입하는 ‘AI 퍼스트(First)’를 선포하고 인력 조정에 나서면서 취업 공포감이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대학가에서는 새로운 자조적 표현까지 등장했다. 과거 인문계 취업난을 뜻하던 ‘문송합니다’를 빗댄 ‘컴송합니다(컴퓨터공학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다.
인문계열에 대한 인식 변화
이러한 변화는 학생들의 인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 학교 졸업생 정 모 씨(24)는 “예전에는 취업을 생각하면 무조건 공학 계열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전공보다 어떤 역량을 갖추느냐가 더 중요해진 것 같다”며 “회사에서도 앞으로 사람의 사고력이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공간환경학부 재학생 김 모 씨(22)는 “문과생이라 취업이 불리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 걱정이 컸지만 최근에는 산업 자체가 빠르게 바뀌고 있어 어느 전공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며 “전공 공부뿐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통해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현재 여러 기업들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인간이 대체되기 어려운 핵심 역량으로 맥락을 읽는 능력, 의미를 판단하는 능력,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공통적으로 꼽는다. 오히려 인공지능이 인간의 언어를 점점 더 정교하게 모방할수록, 기계에 질문을 던지는 인간의 언어, 즉 ‘프롬프트’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맥락을 설정하느냐에 따라 인공지능의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은 단순한 기술 숙련도만으로 형성되기보다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사고력과 해석력, 즉 인문학적 역량과 깊이 연결돼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구직자가 취업 공고를 보고 있는 모습(사진: https://n.news.naver.com/article/002/0002415620?sid=102)
AI가 바꾸는 취업 시장의 공식
AI 기술의 확산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취업 시장에서의 전공 간 우열 구도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과거에는 특정 전공이 절대적인 경쟁력을 가진 것처럼 여겨졌다면, 이제는 기술을 이해하는 능력과 함께 이를 해석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역량이 동시에 요구되는 시대가 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특정 전공만으로 경쟁력을 설명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문송합니다’와 ‘컴송합니다’를 이어 최근에는 ‘법송(법대라 죄송)합니다’, ‘의송(의대라 죄송)합니다’라는 표현까지 등장한 것 역시 특정 전공의 흥망을 넘어 산업 구조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특정 전공에 있다고 해서 의기소침해질 필요도, 반대로 특정 전공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취업이 보장되는 시대도 점차 지나가고 있다는 의미다.
AI가 산업과 사회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지금,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전공이라는 범위 안에 스스로의 가능성을 가두는 일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을 확장해 나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결국 AI 시대의 취업 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전공 자체보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다. 오랫동안 취업난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인문사회계열 역시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기술과 인간 사회를 연결하는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다시 문과생이 필요한 인재로 부상하는 것처럼, AI 시대는 취업 시장의 기준에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윤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