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0 호 소주 대신 사이다로 짠, 달라진 음주 문화
소주 대신 사이다로 짠, 달라진 음주 문화
▲대학 술자리(출처: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2/0002501308)
과거 대학가 신입생 환영회나 2030세대의 회식 자리에서는 술을 억지로 권하거나 여러 주종을 섞어 마시는 폭탄주 문화가 만연했다. 성인이 되면 주량을 늘리는 것을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여기기도 했다. 이러한 강압적인 음주 문화는 종종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건·사고로 이어져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하지만 최근 대학가와 청년층의 풍경은 180도 달라졌다. 술을 강요하기보다는 각자의 주량과 취향에 맞춰 자유롭게 즐기는 분위기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억지로 술을 마시는 대신 잔에 사이다나 물을 채워 건배만 하는 등 주류 소비 자체가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다.
건강과 가성비 중심의 '소버 큐리어스' 확산
2030세대가 술을 기피하는 주된 이유로는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와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 트렌드가 꼽힌다. 소버 큐리어스란 ‘술에 취하지 않은’과 ‘호기심이 많은’의 합성어로 술을 마실 수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태도, 헬시 플레저는 ‘건강’과 ‘기쁨’의 합성어로 즐겁게 건강을 챙기는 태도를 말한다. 즉, 2030세대 대부분이 몸에 좋지 않은 술을 굳이 마셔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의도적으로 맑은 정신을 유지하며 건강을 챙기는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취하는 대신 독서나 운동 등 취미 생활을 즐기고, 바디 프로필 촬영이나 러닝 기록을 SNS에 인증하는 것을 자기 관리의 척도로 여기는 문화가 정착했다.
고물가 시대에 비싼 안주와 술값에 대한 경제적 부담감도 크게 작용했다. 한 번 마시면 사라지는 매몰 비용인 술값 대신, 자기 개발이나 맛있는 한 끼 식사 등 효용이 확실한 곳에 비용을 지출하는 것을 선호한다. 특히 젠지 세대(1997년부터 2012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를 중심으로 기존 소주와 맥주 특유의 알코올 향과 쓴맛을 거부하는 경향이 뚜렷해지면서, 억지로 취하기보다 하이볼, 와인, 칵테일 등 다양한 주종을 가볍게 즐기는 방향으로 소비 패턴이 세분화되었다.
수치로 증명된 국내외 음주율 하락
주류 기피 현상은 실제 통계와 상권의 변화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질병관리청의 국민건강통계에 따르면, 다른 연령대의 음주율이 상승한 것과 대조적으로 20대와 30대의 음주율만 동반 하락했다. 20대의 음주율은 2020년 64.4%에서 2024년 63%로 하락했고, 30대 역시 69.2%에서 65.3%로 줄었다. 특히 주 2회 이상 폭음하는 20대 고위험 음주율은 2018년 15.9%에서 2024년 처음으로 한 자릿수인 9.9%까지 떨어졌다. 국내 성인의 하루 음주량 자체도 2024년 기준 109.7g으로 2014년 대비 30.3%나 감소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현상이 국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023년 "건강에 안전한 알코올 섭취량은 없다"라며 사실상 금주를 권고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알코올 기피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미국 갤럽 조사에 따르면 2024년 미국인의 음주율은 54%로 1939년 조사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으며, 18~34세 청년의 절반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답했다. 맥주 강국인 독일의 맥주 판매량 역시 10년 전 대비 13.7% 감소했다.
소주 매출 감소와 줄줄이 문닫는 호프집
▲소주 매출 그래프(출처: https://www.sisajournal-e.com/news/articleView.html?idxno=419493)
주류 시장의 양대 산맥인 하이트진로와 롯데칠성음료의 실적은 동반 하락했다. 지난해 하이트진로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17.3%, 롯데칠성음료는 9.6% 감소했다. 국내 주류 출고량 역시 5년 새 6.7% 줄어들자 업계는 살아남기 위해 100년 가까이 유지되던 소주의 16도 벽을 깼다. 참이슬, 처음처럼, 새로, 진로 등 주요 소주의 알코올 도수를 15.7도 안팎으로 일제히 낮추며 순한 술을 선호하는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다.
▲줄어든 서울시 호프, 간이주점 점포 수(출처: 서울시 상권 분석 서비스)
주류 소비 감소로 인한 상권의 위축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서울시 상권 분석 서비스에 따르면, 2019년 1분기 1만 6,887개였던 서울 시내 호프·간이주점은 코로나19 여파를 딛고 2023년 4분기 1만 6391개까지 반등하며 잠시 회복세를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청년층의 음주 문화가 급변하면서 점포 수는 확연히 줄어들었고, 작년 3분기 기준 서울시 호프, 간이주점 점포 수는 1만 4,357개를 기록하였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상권이 살아날 것이란 기대와 달리, 달라진 음주 문화로 2년여 만에 주점 2,034개(12.4%)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떠오르는 무알코올 시장, 지브라 스트라이핑
전통적인 주류 소비가 줄어든 빈자리는 무알코올 및 저알코올 음료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음주를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되 상황에 따라 술과 논알코올 음료를 번갈아 마시며 페이스를 조절하는 '지브라 스트라이핑(Zebra Striping)' 소비 방식이 확산하고 있다.
이러한 수요에 발맞춰 시장 생태계도 변하고 있다. 서울 연남동에는 논알코올 맥주, 와인, 칵테일 등 전 세계 70~80종의 무알코올 음료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오프라인 편집숍까지 등장했다. 기존 주류 업체들 역시 카스 올제로, 하이트제로 0.00 등 알코올과 칼로리를 덜어낸 제품 라인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 중이다.
취하기 위해 마시던 과거와 달리 삶의 질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두는 청년들의 가치관 변화가, 오랜 주류 시장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고 있는 것이다.
업계는 위기, 사회는 긍정적 변화
2030세대의 주류 소비 감소는 기존 주류 산업과 대학가 상권에 생존을 위협하는 분명한 위기다. 관련 업계는 기존의 고도수 주류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무알코올 저도수 라인업을 확장하는 등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 트렌드에 발맞춰 생존 전략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반면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러한 변화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맹목적으로 술잔을 부딪치며 관계를 맺던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 이제 젊은 세대는 스스로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챙기고 각자의 취미 활동과 자기 계발에 온전히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음으로 인한 각종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개인의 삶의 질을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취하기보다 '어떻게 더 나은 삶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청년들의 가치관 변화는 우리 사회의 건강한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장은정 기자